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인 칙서 (문단 편집) ==== 실질적인 의도 - 라이벌 견제 ==== 카를 4세가 금인 칙서를 공포한 실질적인 목적은 카를 4세 본인의 영향력을 증대하고, 자신의 정적인 [[교황]], [[합스부르크 가문]], [[비텔스바흐 가문]]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. 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역대 황제 중 이색적으로 [[보헤미아 왕국]]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황제였다. 보헤미아는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가장 큰 제후국 중 하나였지만, 이질적인 [[체코어|언어]]와 문화 탓에 제국 내에서 입지는 애매했다. 카를 4세는 금인칙서에서 자신의 본거지인 보헤미아를 선제후국으로 확정했고,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안에서 보헤미아 왕국은 선제후국으로서 그 입지가 확고해졌다.[* 정작 보헤미아 왕국은 카를 4세의 장남 [[바츨라프 4세]]부터 [[후스 전쟁]] 등에 시달리면서 끊임 없이 내부 분란에 시달렸고, [[야기에우워 왕조]]의 [[러요시 2세|루드비크]]가 [[오스만 제국]] [[파디샤]] [[쉴레이만 1세]]의 침공을 막으러 갔다가 [[모하치 전투]]에서 전사하면서 [[합스부르크 가문]]에게 넘어갔다.] 카를 4세는 이 칙서를 통해 황제를 견제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던 교황권을 견제했다.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가장 큰 목적은 교황이 직접적으로 황제 선출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. 13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교황의 권위가 [[이탈리아 반도]] 밖에서 큰 의미가 없음은 점차 명백해져 갔고, 유럽 각국은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애쓰게 된다. [[잉글랜드 왕국|잉글랜드]]의 경우, [[존 왕]]이 [[인노첸시오 3세]]에게 성무 금지령을 당한 이후로 국왕들은 파문을 받건 말건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,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의 경우 이 시대에 [[아비뇽 유수]]가 일어났다. 1356년의 칙서 역시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 중 하나였다. 아울러 카를 4세는 제국 내에서 자신의 라이벌 가문인 [[합스부르크 가문]]과 [[비텔스바흐 가문]]을 견제했다. 당시 제국 안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[[오스트리아 공국]], [[슈타이어마르크 공국]], [[케른텐 공국]], [[카르니올라 공국|크라인 공국]], [[티롤 후백국]] 등 오늘날의 [[오스트리아]], [[슬로베니아]]와 그 주변 일대를 아우르는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비록 [[합스부르크#s-1|스위스 영토]]를 잃었지만 여전히 [[슈바벤]]과 [[알자스]]에서 외지오스트리아(Vorderösterreich)라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. 이미 [[루돌프 1세]]와 [[알브레히트 1세]], 대립 독일왕 프리드리히(Friedrich der Schöne 1289~1330)[* 알브레히트 1세의 차남.] 등을 배출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호시탐탐 황제 자리를 노리며 카를 4세의 [[룩셈부르크 가문]]과 대립하고 있었다. [[독일 왕국]]의 [[부족 공국|5대 공국]]에 비해 역사가 짧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선제후국이 아니었지만, 선제후국에 들어가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. 그러나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을 배제한 채 선제후국을 명문화했다.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심 영지인 오스트리아 공국은 이후 영구히 선제후국이 되지 못했다. 이러한 조치에 대해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오스트리아 공작 [[루돌프 4세]][* [[독일왕]] [[알브레히트 1세]]의 손자로 알브레히트 1세의 4남인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.]는 격렬히 반대하였다.[* 아이러니하게도 카를 4세와 루돌프 4세는 장·사관계였고, 장인의 통수에 빡쳤던 루돌프 4세는 반란까지 모의까지 했다.] 이후 [[프리드리히 3세(신성 로마 제국)|프리드리히 3세]] 때 다시 제위를 차지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곧바로 오스트리아를 제국에서 유일한 대공국으로 격상시켜 선제후국을 능가하는 특권을 부여했고, 이어 [[페르디난트 1세]]가 [[보헤미아 왕국]]을 재획득하여 선제후 자격을 획득했다. 카를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이어 제국 내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[[비텔스바흐 가문]]도 견제했다.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공국과 라인 궁중백령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2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. 이에 카를 4세는 한 개의 가문이 두 개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논리로 차자계열인 바이에른 공국의 투표권을 박탈시켰다. 이로서 중세부터 유서 깊은 바이에른 공국은 선제후국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[* 그래서 바이에른 비텔흐바흐 가문은 투표권을 다시 얻기 위해 성직 선제후국에 목숨을 걸었고, 결국 쾰른 전쟁을 통해 약 200여년 동안 숙질계승으로 쾰른 선제후국을 숙질계승으로 세습화하였다.], [[30년 전쟁]] 이후에야 팔츠 선제후국의 투표권을 빼앗아 다시 선출권을 가졌다.[* 다만 팔츠 선제후국도 [[베스트팔렌 조약]]으로 투표권을 되찾았다. 이후 팔츠와 바이에른은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 [[카를 7세|카를 알브레히트]]의 황제 선출을 제외하면 카를 알브레히트의 아들 [[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]]가 후사 없이 사망해 팔츠 선제후 [[카를 테오도르|카를 4세 테오도르]]가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서 바이에른을 상속받기 전까지는 내내 으르렁대며 불편한 감정을 이어갔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